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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발간

『빗물 그 바아압』발간사 (2020년 10월 출간 예정)

by vie 2020. 8. 19.

  이 책은 유서 한 통쯤은 몸에 지니고 있거나, 자살 미수 2범은 돼야들어갈 수 있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졸업생의 글을 엮은 것입니다. 이 과정은 20059월에 개교해 올해로 15년째 된 노숙인을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학대학에서, 오랫동안 빈곤계층을 대상으로 사목을 해오던 임영인 성공회 신부에 의해 탄생됐습니다. 임 신부는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 노숙인들에게 의식주를 비롯해 당장에 필요한 물적 조건을 제공한다고 해서 그들이 빈곤이나 노숙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우는 거의 못 봤다고 했어요. 결국 그가 도달한 노숙인 자활의 궁극적 목표는 자존自尊감 회복이었습니다. 자존감 회복은 당연히 자존自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과 성찰에서부터 찾아져야 하는데, 그건 바로 인문학의 내용이고 방법이었습니다. 때마침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통해 클레멘트 코스라는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과정의 성공적인 미국 사례가 국내에 소개됐지요. 이에 힘입어 다시서기센터라는 노숙인 종합복지센터 내에 부설로 한국판 클레멘트 코스인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어쩌다가 거리 노숙인이 됐을까. 사례마다 다르겠으나, 개인차원의 요인과 사회구조적 요인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 사회 체제는 필연적으로 적절한 수준의 자원, 기회,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양산하고 그들을 주변으로 내몰게 돼있습니다. 극단적인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거리 노숙인이지요. 그들이 겪는 절대 빈곤은 주거, 건강, 교육, 인적자원 내지 사회적 네트워크라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로부터 배제됨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노숙인이란 단순히 길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가치중립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직업도 없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며, 오로지 남의 자선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루한 사람들이라는 다분히 비하적인 호칭이지요. 노숙인이라는 호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용을 상실해 버린 잉여존재와도 같은 일종의 사회적 낙인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범죄자로, 건강해도 병자로 간주되기 십상인 노숙인이라는 존재는 있어도 보이지 않는, 실은 보기 싫어서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Invisible men)인 셈이지요. 우리 눈에서조차 철저하게 배제된 존재들이 거리 노숙인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무한 경쟁사회에서 낙오돼 배제되는 거리 노숙인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제 탓일 뿐이라고 무시해버리면 되는 걸까요. 1949년 유엔 세계인권선언문에서는 모든 인류는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궁핍으로부터의 자유가 인권이 추구하는 목표이며, 그런 궁핍으로부터 국민을 벗어나게 할 의무가 모든 국가에 있다는 것을 인류 공통의 선언으로 못 박은 것이지요. 빈곤은 일차적으로 물질의 빈곤이지만 상대적으로 모험의 빈곤, 사랑의 빈곤, 꿈의 빈곤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절대적, 상대적 빈곤에 처한 거리 노숙인들은 삶의 서사를 포기하거나 달관하게 됩니다. 삶이 하루하루 침식되다가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는 것이지요.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을, 떨어지지 않을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떨어진 이들을 바닥에서 받쳐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사회 안정망이 없는 국가에선 누구든 잠재적 노숙인입니다.

 

  성프란시스대학은 떨어진 바닥, 내몰린 거리 위에 세워진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과정입니다. 당장의 하루 잠자리도, 빵 한 조각도, 옷 한 벌도 제공할 수 없는 인문학과의 조우는 거리 선생님들에게는 낯선 불청객 같았을 겁니다. 당장 상품화되지 못해 자본주의 불온학(不穩學)이라 할 수 있는 인문학이 무한경쟁에서 밀려난 자본주의 사생아로서 노숙인과 만난 것이니까요. 이 불온한 만남에서 노숙인 선생님들은 문학, 역사, 철학, 예술사, 글쓰기 등 다섯 과목, 한 학기에 3과목(글쓰기는 두 학기에 걸쳐), 일주일에 삼 일, 과목 당 2시간씩, 한 학기 15, 일 년 30회 수업을 듣습니다. 낮에는 자활근로나 인력시장에서 얻은 막일을 하고 저녁에 지친 몸을 끌고 학교로 오지요. 그야말로 형설지공입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5권 졸업문집과 각 기수 카페에 올린 글들 중에서 성프란시스대학 교수와 자원활동가로 구성된 책 발간위원회가 선별해 엮은 것입니다.

 

  노숙인 학습자 연령은 20대부터 70대까지, 초등교육조차 받지 못한 분부터 대학졸업자까지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아온 삶의 내력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삶의 나락그 언저리를 맴돌다 온 것이지요. 스스로 삶을 포기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가늘지만 모진 생명의 끈에 이끌려 다시 소환된 삶의 내력. 이런 굴곡진 삶의 내력을 지닌 노숙인 학생을 만난 교수자는 텍스트 속 문자에 갇힌 문사철이 노숙인 선생님의 몸에서 말로 열려, 강단인문학이 거리의 인문학으로 활보하는 현장인문학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는, 모두가 선생님인 선생님의 학교가 되지요.

 

1서울역 일기는 지금 살아가는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일기 같은 글이 모여 있습니다. 자신의 밥벌이를 돌아보고, 살기 위해 먹고 자고 입는 것에 대해 성찰합니다. 이런 성찰을 통해 노숙인이라는 사회적 부름 호명에 대해 되묻지요. ‘노숙인, 나는 누구인가?’

 

2거리의 인문학은 거리 삶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인문학. 그 낯설고, 흥분되며, 혼란스럽고, 벅차고, 아름답고, 슬프며, 절망하고, 무너지고, 일어서며, 감격했던 인문학 1년 과정에 대한 저마다의 술회를 쏟아냅니다.

 

3사랑이 저만치 가는데는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 보고 싶지만 차마 다가갈 수 없는, 두고 떠나온 고향, 부모, 아내, 자식, 친구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풀어놓습니다.

 

4길벗 도반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지우고 싶은, 눈 감아 버리고 싶은, 쓰러져 바닥에 붙어버린, 하지만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다시 일어선, 혼자가 아닌, 내 안에 너무도 많은 거울 속의 나들을 들여다봅니다.

 

5부 부록 두 드림2009년 성프란시스대학 내의 풍물동아리로 시작된 두 드림단원들의 곡절 많은 신산고초의 삶을 풍물난장 마당극으로 풀어내려 기획한 극본입니다.

 

  성프란시스대학은 201211거리의 인문학(삼인) 책을 냈습니다. 이 책에서는 설립자, 교수, 학생, 실무, 자원활동가 등 각자 관점에서 학교조직, 행정, 교과내용과 과정에 대해 느낀 점들을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의의라면 무엇보다 이 책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빈곤층을 위한 인문학강좌에 하나의 이정표이자 매뉴얼을 제공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리의 인문학을 내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었습니다. 학교의 실제 주인공인 선생님들이 매년 발간해 쌓아온 졸업문집의 글들을 거의 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해서 학교운영위원들 사이에서는 언젠간 꼭 선생님들만의 글을 담은 책을 내자는 묵언의 약속이 있었지요. 성프란시스대학 창립 15주년 해인 2020년에 발간하게 된 빗물 그 바아압은 그 약속의 완성입니다. 길 위의 바보성자, 프란시스 성인께서 이 책을 읽는다면 거리 선생님을 이렇게 부르지 않을까요. “! 길벗, 도반이여!”

 

  거리 위 고단했던 삶을 서둘러 내려놓으신 고성원, 김대인, 김문수, 김영조, 문재식, 문충섭, 신득수, 유창만, 윤보영, 이덕형, 이대진, 이홍렬, 전태선, 정인술, 천성우, 홍진호 선생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빗물 그 바아압발간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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