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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소식

나의 이야기, 정석 씨의 이야기

by vie 2020. 7. 29.

13기 인문학을 함께 했던 정석님의 이야기입니다. 정석님이 직접 쓰신 글로, 2017년 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에서 출간한 홈리스생애기록집에 수록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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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정석씨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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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 살이로 시작된 나의 어린시절

 

나는 장이동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두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며 아버지가 나와 내 어머니를 두고 집을 나갔다. 그렇게 오갈곳 없어진 어머니와 나는 떨어졌다. 어머니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나는 어머니의 아는 지인의 집에 남겨졌다.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두 달에 한 번 어머니가 나를 보러 오시긴 했지만 만나서 보내는 시간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도 짧았다. 당시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껌 한 통과 과자 한 봉지를 쥐여주고 떠났는데 그때마다 나는 대문 앞에 가 엄마를 부르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에서 5년을 지냈다. 그 5년의 세월은 나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갖은 구박과 구타, 한겨울에 난방도 안 되는 마루에서 홑이불 하나만 덮고 자는 삶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는 나를 데리러 오셨다. 그 날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꿈만 같았다. 

 

잠시 행복했던 시간, 또 다시 찾아온 불행

 

어머니는 식당을 냈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살 수 있었다. 가게는 작았지만 어머니와 같이 잘 수 있고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어머니의 식당은 날로 번창했고 돈도 제법 버셨다. 하지만 식당이 작다보니 많은 손님을 맞으려면 어머니와 내가 기거하던 방까지 내어 주어야 했기에 나는 장사가 끝날 때까지 밖에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같은 건물에 사는 친구 집이나 다방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생활도 참 행복했다. 그 후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아무 탈 없이 잘 살았다. 하지만 불행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찾아왔다. 

 

그 불행은 아주 잔인했다. 어머니가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게 되며 우리의 가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또, 어머니는 그 충격에 몸져 누우셨고 때문에 끼니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아픈 몸을 이끄시고 다시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기 시작하셨다. 집주인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밀린 월세를 달라 독촉했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세상 둘도 없는 죄인이 되었다. 그런 시간이 나는 너무 싫었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난 학교를 나가지 않고 가출을 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잘 나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몇 번의 가출을 하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 첫 직장은 중국집 배달일이었는데 그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했다. 그 이후 레스토랑 웨이터를 하면서 주임 지배인까지 하게 되었고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나를 밑바닥으로 밀어버릴 줄은 몰랐다. 나는 미래를 대비할 생각도 없이 월급을 버는대로 족족 써버렸다. 늘 술로 하루를 마감하는 삶을 살았고 사회생활 역시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풍족한 생활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줄 알았던 무지함 때문이었다. 그러다 레스토랑 사업이 사양길에 들어서며 문을 닫았고 IMF가 오며 나 또한 실직했다. 

 

그렇게 다시 떠도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10년 넘게 가지 않았던 집으로도 되돌아 갈 수 없었다. 자연히 거리를 방황하게 되었고 무작정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러다 주위 노숙인들의 도움으로 서소문공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끼니를 챙길 수 있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줄을 서서 밥을 세 그릇이나 게눈 감추듯 비웠다. 처음에는 지하도나 공원에서 박스를 깔고 잠을 잔다는 게 창피해서, 밤에는 해가 뜰 때까지 돌아다니고 공원화장실에서 씻고 지하철을 타고 밥시간이 될 때까지 잠을 자는 게 일과가 되었다. 

 

쉼터와 거리의 악순환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런 생활도 몇 년째 하다 보니 그 생활에 물들게 되었다.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도 없는 탓에 서서히 몸도 마음도 지쳐갔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만 싶었다. 그렇게 그 날도 아무 희망도 미래도 없이 배고픔만을 달래기 위해 서소문공원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쪽지 한 장을 주며 자신들과 함께 가면 따뜻이 먹고 잘 수 있으며 일자리도 구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고민할 것도 없이 그들을 따라 나섰다. 

 

도착한 곳을 대방동에 있는 게스트하우스(홈리스 쉼터)였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냥 밥 굶지 않고 길거리에서 자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만으로 만족하며 일을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노가다 첫날, 나는 숙소로 돌아와 끙끙 앓았다. 삼사일을 앓다가 다시 일을 나가고 하는 생활이 반복되니 돈이 모이질 않았다. 꾸준히 나가야 돈을 모을 수 있는데 내가 그동안 세상 참 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곳에 적응해가던 중 나는 친구도 사귀며 다시 술을 시작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니 문제가 생겨 싸움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여러 번 입퇴소를 반복했다. 퇴소를 하면 거리에서 술로 하루를 보내고 돈이 떨어지면 일용직 하루 나가고 다시 거리에서 지내다 다시 힘들어지면 입소.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여러 쉼터를 전전하며 내 인생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대로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마지막 선택

 

끝이 없는 캄캄한 땅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왜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살지 못할까, 왜 나는 무슨 일만 생기면 먼저 그 일을 이겨낼 생각은 하지 않고 포기부터 먼저 할까,  언제까지 이렇게 남은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야하나, 이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나 자신을 책망하고 달래고 해보았지만 그건 얼마 가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식당일부터 뱃일까지 해보았지만 내 앞에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술을 마셨더니 몸은 상하고 정신은 멍들어갔다. 

 

그래서 다시서기지원센터(홈리스 지원센터)를 찾아가 선택한 곳은 알코올 정신병원이었다. 이대로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입원과 동시에 나는 '내가 이런 곳까지 오다니'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퇴원을 하면 새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치료를 마치고 퇴원 후 다시서기에서 자활을 시작했다.

 

7전 8기가 안 되면 10전 11기의 도전 정신으로

 

퇴원 후 첫 달은 캄캄한 방안에 앉아 TV만 시청하며 보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내 손에는 또 다시 술병이 들려 있었고 다시 술취한 채 출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두 달을 하고 스스로 일을 그만두고 한 달을 고시원에서 두문불출하며 술로 살았다. 그러다 나의 사례담당 선생님의 도움으로 인문학 강좌를 알게 되었다. 그래, 다시 시작해보자. 7전 8기가 안 되면 10전 11기의 도전 정신으로. 그렇게 다시 한 번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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