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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5호

[인물 인터뷰] 짠하네 - 16기 개근의 주인공을 만나다

by vie 2021. 2. 25.

글 / 김연아
인터뷰어 / 김연아, 강민수
인터뷰이 / 최인택 (성프란시스대학 16기)

 

 

 

<짠하네>
툭, 은행열매
바닥에 짓뭉개져
엉망이 된 너

‘5,7,5 완벽한 음수율의 하이쿠 시형식. 17자에 志와 情을 온전히 담다니! 쉬 가시지 않는 여운은 또 어떤가! 놀랍다는 말밖에.’ 글쓰기수업 박경장 교수님의 감상평입니다. 이 시를 쓰신 최인택 선생님께서는 성프란시스대학에 오기 전까지 글이라곤 집에 돈 부쳐 달라는 편지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최인택 선생님은 16기 선생님들 중 유일하게 1, 2학기 통틀어 단 한 번도 수업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었기에 어떠한 마음이셨을지 그 소감이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카페에서 만나 뵌 선생님은 카페라떼에 설탕 두 봉지를 넣으셨어요.

Q: 선생님, 커피에 설탕 많이 넣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A: 어렸을 때 키워주신 고모, 고모부 두 분이서 미군부대에 다녔어요. 고모는 웨이트리스고 고모부는 주방보조. 그래서 양키 물건[최인택 선생님은 ‘양키’라는 표현을 비하의 의미가 아닌 당시의 고유명사(‘인천 양키시장’처럼)로 사용하고 계셔서, 말씀하신 그대로 표기하였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은 쌓아두고 먹었어요. 어렸을 때 커피 맛을 모르니까 커피에 설탕만 잔뜩 넣어가지고 먹는 게 버릇이 돼가지고. 커피 맛을 몰라요, 나는.

Q: 고모와 함께 사신 거예요?

A: 예, 그때 형편이 안 돼서, 말하자면 나를 의탁한거죠. 아버지가 이북에서 누나, 여동생 데리고 셋이서 월남을 했어요. 아버지가 자식을 넷 낳았는데, 막내가 쌍둥이였어요. 그때 시골에서 아버지가 군대 생활할 때인데, 옛날에는 집에서 애를 낳았잖아요. 어머니가 임신중독증이라고 처치를 잘못해가지고 낳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쌍둥이 중에 한 명은 낳고, 한 명은 사산하고. 아버지가 군인이라 2년마다 전국을 돌아야 하는데, 누구 도와줄 사람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나를 서울에 있는 고모 댁으로 보낸 거예요. 또 내가 장남이고 하니까 서울 가서 살라고. 고모가 이태원에 살아서, 나는 보광국민학교에 다녔어요.

Q: 거기서 중학교까지 들어가신 건가요?

A: 아니, 우리 때가 마지막으로 중학교를 시험 봐서 들어갔어요. 서울에서 시험을 봤는데, 1차, 2차 다 떨어졌어요. 그래서 야간을 가라고 했는데, 어린 나이에 야간은 가기 싫었어요. 평판이 안 좋았어. 알지 모르겠는데, 전쟁영웅 있어요. 백선엽 장군이 선인중학교라고 인천에 새로 세운거지. 처음 학교를 세우니까 아무나 다 뽑았거든. 그래서 거길 들어가게 된 거예요. 학교는 제물포에 있었고 부평에 미군부대 큰 게 하나 있었어요. 그때 서울에서 부평으로 이사를 갔는데 내가 거기 살면서 학교를 다닌 거예요.

Q: 그리고 고등학교에 가신 거예요?

A: 네. 근데 말썽 많았어요. 애들하고 돈 벌러 다니고 그랬어요. 식당 가서 일하고, 청량리에 가방 공장이 그 당시 유명해서 거기 가서 일하고. 학교생활은 엉망이었지.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반에서 1등은 도맡아서 장학금도 받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친척집에 있으니까 눈치가 보이는 거예요. 장학생이라서 학비도 얼마 안 됐는데, 돈 달라고 할 땐 그렇게 눈치가 보여. 며칠 밤을 새다가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면 끝내 얘기를 못 했어요. 그러면 학교에서 되게 독촉했어요. 선생님한테는 심한 말 듣고. 그러다 보니까 공부에 점점 흥미도 잃고 안 좋은 길로 빠지게 된 거죠. 아버지가 월남에 파병 갔다가 돌아와서 사준 세이코 시계도 전당포 맡겨놓고 가출했었어요.

Q: , 아버지가 월남전까지?

A: 예. 그러면서 집안이 조금 폈어요. 돌아오면서 집도 사고 형편이 좀 폈는데, 그러면 나를 불러서 보살폈어야 하는데 나를 안 불렀어요. 방학 때 어쩌다 집에 돌아가도 항상 겉도는 느낌이었어요. 집에 대한 애착 같은 게 전혀 없이 자랐죠. 근데 또 집에서는 장남이라고 약간 기대감도 있는데, 내가 자꾸 다른 길로 빠지면서 점점 집하고 멀어진 거예요. 연락 안 한 지 20년 됐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데, 왠지 살아계신 것 같아요. 아흔 넘으셨을 텐데…. 쭉 혼자 살다가 보니, 여태까지는 혼자 살고 있어요. 뭐 결혼도 안 하고. 근데 결혼 못 했다고 후회하는 것도 없어요. 내가 가족이 있어봤자, 거느릴 능력도 안 될 것 같았고, 나 같은 자식이 있어봐야 키워놓으면 속만 타죠. 없는 게 낫지. 혼자 사는 게 백 번 좋다고.

Q: 그렇게 혼자 서울에 사신 거예요?

A: 답십리에 살면서 설비가게에서 일용직 비슷하게 일을 했어요. 이런저런 집수리나 보일러 고치는 일이요. 경력이 한 20년 가까이 돼요. 꾸준히 한 달에 20일 넘게 일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동네에 재건축 바람이 불어서 일거리가 확 줄었어요. 20일 넘게 하던 일이 그야말로 일주일도 못 하는 식으로 줄면서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은 많아지고, 그때 도박 비슷하게 자전거 경륜하고 미사리에서 보트 경쟁하는 경정을 했어요. 오랫동안 꾸준히 가던 곳이긴 한데, 일거리 줄고 나서는 일주일에 5일을 갔죠. 수, 목은 경정, 금, 토, 일은 경륜이나 경마. 그런데 교통사고가 나고 다리하고 발가락이 골절돼서, 느낌에 오른쪽 다리가 약간 짧아진 거 같아요. 조금 피곤하게 일하면 저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금방 못 일어나요.

Q: 성프란시스대학은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A: 이제 몸도 여기저기 안 좋아서 일도 제대로 못 하고 돈도 떨어지고, 무기력증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살아봐야 뭐 하나 생각을 했어요. 그때 결정을 딱 했어요. 그만 살자. 마음의 준비를 딱 하고 밧줄을 들고 수락산으로 올라갔어요. 사람들이 안 보는 데, 으슥한 데 죽을 자리를 봤어요. 부러지면 안 되니까 탄탄한 나무도 찾아 놓고. 주머니에 만 원짜리 몇 갠가 있었던 거 같아요. 전 재산이었죠. 나무 하나 딱 골라 놓고 마음의 준비를 따악 하는데, 그때 카톡이 오더라고, 카톡이. 연락처 번호도 다 지웠었는데. 봤더니 누가 돈을 보냈대. 그게 뭐냐면, 그때 살던 방 보증금 다 까먹고 마지막 방세도 다 주고 나온 거였거든요. 그 주인아줌마가 이사 비용에 쓰라고 마지막 방세를 나한테 보낸 거예요. 25만 원을. 밧줄 잡고 딱 있는데. 아, 아직은 때가 아닌가보다. 그때 25만 원을 보면서 든 생각이 뭐냐면, ‘아, 로또를 몇 번은 사겠다.’였어요. 그렇게 내려와서 25만 원 가지고 한 2주를 만화방 가서 자면서 로또 사고 그랬는데, 그게 될 리가 있나요. 나중에 돈이 완전히 떨어지니까 죽고 싶은 마음보다는 동네 사람들한테 돈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생전 돈 없어도 그런 말 안 했거든요. 새벽에 길거리에서 추워가지고 덜덜 떨고 있는데, 설비가게 사장을 만났어요. 내가 돈 달라고 하니까 사장이 10만 원을 주면서 왜 그러냐고, 왜 이렇게 됐냐고, 그래서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사장이 동네 통장하고 좀 알어. 통장을 불러서 얘가 이렇다 하니까 이런 상태면 기초수급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고. 당장 급하면 긴급지원이라고 40몇만 원 받을 수 있으니까 받아서 일단 살아라. 그래갖고 동사무소에 그 긴급지원 신청하러 갔는데 거기서 서울역 다시서기센터를 알려 준 거예요.

Q: 그게 몇 년도예요?

A: 재작년. 아니, 3년 전이네. 다시서기센터하고 인정복지관이라고 여기보다 조금 작은데 거기에도 몇 달 있었어요. 다시서기센터에서는 한 달에 20일만 있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지내다가 자활근로를 시작했어요[보건복지부 규정상, 노숙인 일시보호시설은 동절기를 제외하고 한 달에 20일까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보통 몇 군데 일시보호시설을 옮겨 다니며 생활한다]. 그러다가 공고를 봤어요. 성프란시스대학 공고를. 내가 학교생활에 대한 미련이 있었나 봐요. 성실하지 못했던 거. ‘이야, 대학이란다. 내가 어디 대학 근처나 가 보겠나.’ 싶어서 신청을 했어요. 근데 그때 신청받던 팀장님이 나이가 들어서 좀 어려울 것 같다면서, 여기 혹시 떨어지면 장구 강습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신청하게 됐는데, 인원이 적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합격이 된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하려고 처음부터 마음먹었어요. 이 나이 먹어서 언제 기회가 있나 싶어서. 평소에 발표해본 적도 없는데 나대면서 발표도 하고. 우리 기수에서 나만 개근했잖아요.

Q: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은데.

A: 그렇죠, 학창시절도 생각나고. 알게 모르게 대학에 대한 미련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고등학교 학비 대는 것도 어려웠지만, 아버지 꿈이 나 육군 사관학교 보내는 거였거든요. 근데 육사도 실력이 돼야 가지. 그때는 서울대 저리 가라 할 정도였어요. 택도 없는 희망사항이었지.
이렇게 선생님의 삼행시가 탄생한 거군요! (글쓰기수업 첫 과제가 이름으로 삼행시쓰기였다)

최: 최고로
인: 인기 있는 학생이 되겠습니다.
택: 택도 없는 희망사항입니다.

Q: 수업은 어떠셨어요?

A: 코로나 때문에 기간이 좀 짧았다는 게 아쉬워요. 근데 배운다는 거 자체가 그동안 못 채운 걸 채운다 하는 만족감이 있었어요. 진짜 배우고 있다고 느낀 게 퀴즈프로그램을 보면 내가 맞추는 게 늘은 거예요. 예술사 시간에 본 건데,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그림 있잖아요. 그게 퀴즈프로그램에 나오더라고요. ‘어, 나 저거 아는 건데.’ 그랬지. 그리고 김동훈 교수님 토론 이끌어 가시는 게 인상 깊었어요. 모든 의견을 포용하면서도 다툼 없이 토론을 진행할 수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열정적이었던 교수님은 박한용 교수님. 교수님이 특별히 시간 내서 코로나 사태에 대해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하셨는데, 나중에 티브이에서 다른 유명한 교수가 코로나 강연을 하더라고요. 근데 그걸 보면서 박한용 교수님이 강의한 내용이 더 깊이가 있다 느꼈죠.

Q: 선생님, 글쓰기는 별로 안 좋아하셨나 봐요. (웃음)

A: 글쎄, 제가 요새 댓글도 안 써요. 부담 돼서. 여태까지 살면서 게임을 해도 채팅하는 것도 안 하는데, 글쓰기는 왠지 자신이 없고, 내가 할 수 있을까? 한 줄이라도 쓸까? 싶었어요. 하여튼 몇 번 하다 보니까 그래도 몇 줄 쓰긴 쓰더라고 하하. (근데 재능 있으신 거 같아요.) 아니, 재능은 없어요. (그 전엔 안 써보셨어요?) 어우, 그럼요. 우리 땐 편지세대니까. 편지도 내 평생 스스로 쓴 건 없고, 서울에 생활하면서 집에다가 돈 좀 부쳐달라고 그때 할 수 없이 쓴 거 그거 한 통이에요.

Q: 근데 <짠하네> 시는 어떻게 나온 걸까요?

A: 긴 글은 자신도 없고, 짧은 거 하나 쓴 거죠. 그때가 한참 일본의 하이쿠 배울 때였어요. 거리에 은행 열매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무심코 밟고 지나가면서 바닥이 지저분해지잖아요. 그때 이성선의 <별을 보며>라는 시를 외웠었는데, 거기에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 ‘엉망으로’가 머릿속에 박힌 거예요. 주제가 떠오르면 뭐가 된다는 게 맞긴 맞나봐요. 지저분해진 은행 열매를 보니까 갑자기 그게 떠올랐어요.

Q: 1년 동안 수업 들으시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을까요?

A: 1학기 수업 마치면서 백일장 했잖아요. 그 중에서 다섯 명만 선정해서 상품권을 줬었는데, 참가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건데, 참가상도 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때 많이 실망하셨죠?)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지요. 워낙 글쓰기도 잘 안 되고 급하게 쓰는 건 재주가 없으니까 내가 미리 생각한 게 있었어요. 오랫동안 계속 생각을 하면서 뭘 쓸지 내용을 준비했어요. 근데 백일장 주제가 나왔는데 아무것도 안 맞아(웃음). 물론 주제에 끼워맞춰서 쓰면 됐었는데 이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행복에 대해서 약간 비관적으로 썼는데, 말도 안 되게 썼죠.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다. 숨 쉬는 것조차 행복이다.

<행복>
오랜 기간 공황장애로 시달린 적이 있었다. 가위 눌린 느낌에 잠이 깨면 기도가 막힌 듯이 호흡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 분명히 숨을 쉬고 있는데도 아귀지옥의 아귀의 식도가 바늘 두께만 해 음식물을 삼키지 못해 피를 토하듯 바늘구멍으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잠시 진정된 뒤에 정상적인 호흡이 되돌아오면 한 방울의 눈물과 함께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다. 행복, 숨 쉬는 자체가. 자연적인 숨 쉬기, 평소 당연히 생각했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나를 되돌아 본다. 행복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을….

Q: 근데 개근이라는 게 중간에 몸이 아플 수도, 가기 싫을 수도 있는데, 위기가 있지 않으셨어요?

A: 초심을 유지하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한다는 게 모토였어요. 개근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했고, 특별히 몸이 아픈 적도 없었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말을 지키고 싶었어요. 신중한 성격이라 뭘 한다 하면 거의 한다고 보거든요. 담배 끊는 것도 남들은 어렵다는데 난 우스워요. 지금은 담배를 피지만, 이것도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어요. 근데 담배를 끊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오래 살 것도 아니고, 건강 지켜서 뭘 할 것도 아니고.

Q: 지금은 행복하세요?

A: 아무 생각 없어요.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 아니겠어요. 막말로 누워서 티브이 편안하게 보는 게 행복하다 생각하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하다 생각하면 한없이 불행한 거고. 그냥 사는 거예요. 희망이고 뭐고 없어요. 근데 희망 하나만을 얘기한다면, 로또가 되는 거. (웃음)

Q: 1년 간 수고한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

A: 당연하게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해요. 자랑스럽다 그런 것도 없어요. 1년 동안은 삶의 활력이 조금은 늘은 것 같고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아직까지 머릿속에 시가 돌아다니고 메말랐던 감성이 조금은 생기지 않았을까. 아직까진 기억력이 괜찮은지 몇 번 외우다 보면 외워지더라고요. 어느 순간 잊어 먹겠지만…, 지금도 외울 수 있어요.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이성선, 별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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