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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제2호

[역전칼럼] 북어와 가재미

by bremendhk 2020. 8. 22.

박 경 장 (글쓰기 교수, 문학평론가)

 

낯선 이들과 처음 만날 때 “목소리가 참 좋으시네요. 중후한 중저음의 베이스 톤이 참 매력 있습니다”고 내 목소리를 칭찬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인사치레겠지만 처음 대면하는 여성에게서 그런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타고난 목소리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우리 가곡을 참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편이다. 가사를 다 외우는 몇 곡 안 되는 노래도 모두 가곡이다. 물론 십팔번도 가곡이다. 해서 느닷없이 불려 세워져 노래를 해야 할 자리면 으레 가곡을 부르곤 한다. 하지만 흥겨운 술자리에서는 여간 곤욕스럽지 않다. 가사를 끝까지 아는 노래가 가곡 밖에 없으니 용서를 구하고 가곡을 부르다보면 결국 술판의 흥을 깨기가 일쑤다.

 

술좌석에서 반복되는 이런 곤욕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대안을 짜낸 기억이 있다. 양명문 작시, 변훈 작곡 ‘명태’를 내 새로운 레퍼토리로 삼는 것이었다. 베이스 바라톤 오현명의 중후한 남성 목소리로 우리 귀에 익숙해진 가곡 ‘명태’는, 한국 중년 남성의 정서를 가슴 뭉클한 시로 대변하면서도 결코 무겁거나 처지지 않고 흥을 돋울 수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대안은 예상대로 적중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술판에서 어느 정도 흥이 오를 때쯤 피할 수 없이 불려 일으켜질 때면, 나는 자신 있게 일어나 ‘명태’를 불러제꼈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쇠주를 마실 때, 카! 나는 시인에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이 없을 지라도, 음, 명태, 허허허허,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더불어 나는 소주 한잔을 입 속으로 털어 넣는 것으로 그날 술판의 대미를 장식하곤 했다.

 

하지만 나의 가곡 '명태'도 2000년 초에 들어서는 흥겨운 술판에서 '금지곡'이라는 비운을 맞게 됐다. IMF금융대란의 여파로 40대 초 중반의 학교 동창, 선배들이 하나 둘 직장에서, 삶의 터전에서 '명퇴'라는 비운을 맞았기 때문이다. '명태와 명퇴' 사이의 묘한 연상작용으로 자의반 타의반 나의 가곡 '명태'는 술판에서 '명퇴'를 당하고 만 것이다. 발음상의 비슷함뿐만 아니라, 가곡 명태의 가사 속에는 명퇴를 당한 중년 가장의 심사를 비극적으로 대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극의 주인공처럼 '쫙쫙 찢어지어' 자신의 운명을 대신 맞아 주는 것으로 나의 가곡 '명태'를 이해한다면, 일면 '카타르시스' 작용을 할 법도 하지만, 실은 그들 자신이 명태처럼 쫙쫙 찢어지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정작 노래를 부르며 비극 주인공을 대역하는 나는 아직까지는 대학 시간강사라는 비정규직 직장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었기에, 내 쪽에서 자진해 명태를 명퇴시키고 말았다.

 

학교동창 선배들이 하나 둘씩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약육강식 투전판 같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있을 때, 나 또한 20여년 시간강사로 말이 좋아 객원교수로 서서히 물기 없이 강단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전공강의는 고사하고 교양영어만 가르치는, 그것도 똑같은 강의를 하루 세 네 시간씩 연달아 반복하다보면, 내가 말하는 건지 내 속에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자괴감이 먼지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후줄근해진 몸으로 막걸리 한 병 사 들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 앞에 선 내 몰골은 영락없는 명태였다. 나무막대기에 주둥이가 꿰인 채로 하루하루 말라가고 있는 북어였다.

 

북어

                                                                                                                                   최승호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2008년 봄 다시서기 센터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인문학 글쓰기 강좌를 맡게 되었다. 교양영어가 아닌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된 것이 몇 년 만이던가. 말라비틀어진 가슴지느러미에는 다시 물기가 돌고, 막대기 같았던 머리에는 다시 푸른 바다 속 물푸레나무 같은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구석방 책장에 처박힌 인문학서적들의 먼지를 하나 둘씩 털어내기 시작했다.

 

저녁 서울역사 주위 길바닥에서만 그것도 지나가는 눈길로만 보아왔던 노숙인들을 강단에서 처음 대하던 날, 나는 그들의 용모 단정하고 말쑥한 차림에 다소 놀랐다. 외모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대담성과 나름대로 펴나가는 논리에는 더더욱 놀랐다. 아마 이분들도 학교에 간다는, 더군다나 인문학 대학에 간다는 자부심과 들뜬 마음에 신입생 같은 학생의 몸과 마음가짐을 하고 왔을 것이다.

 

몇 주간에 걸쳐 글쓰기 기초를 끝내고 고전문학 텍스트를 읽고 본격적인 주제글쓰기단계로 접어들자, 수업받는 노숙인 선생님들 간의 학력 차와 수업 이해도의 폭으로 인해 수업집중력에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글쓰기 과제를 내주면, 몇몇 분들은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리고 몇 줄 쓰다가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짧은 글의 막막함에 가슴 답답해했다. 제출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저들의 눈길을 보아야하는 내 쪽이 더욱 미안하고 민망스러웠다. '나도 글을 잘 쓰고 싶은데....' 구원의 요청을 바라는 눈길들을 바로 쳐다보지 못함은 내 능력부족 탓이리라. 그렇게 자신의 능력부족을 탓하며 한 학기가 지나갔다.

 

한 학기를 마치고 그동안 글쓰기과제로 받은 글들을 정리할 겸 다시 읽어보았다. 어떤 주제의 글이든 시작한 뒤 몇 줄 지나지 않아서 예외 없이 모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내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노숙인 선생님들 사이에 한 학기 동안 가장 자주 입에 오르내린 단어가 다른 인문학 강좌인 문학시간에 배운 '트라우마'라는 단어였다. '정신적 외상'이라는 이 의학용어가 작가들의 글쓰기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에 대한 문학 교수님의 강의 내용에 '필'이 꽂힌 것이다. 그렇다. 노숙인 선생님들에게 '트라우마'야 말로 글쓰기 재료로서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또 치유하고 극복해야할 과제였던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생부(生父)아버지로부터 폭력과 법부(法父) 사회로부터 폭력에 대한 정신적 외상을 앓고 있었다. 이런 폭력으로 상처 난 몸과 마음을 치유받을 수 있는 어머니와 아내의 따뜻한 가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가정이라는 성소를 잃어버린 정신적 외상을 앓고 있었다. 이런 외상들이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규칙 또는 법칙들(맞춤법, 띄어쓰기, 단락나누기)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으면서도,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글쓰기의 재료인 것이다.

 

넘어진 자는 결국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 이 학기 들어서 나는 이들이 자신의 트라우마에 더욱 다가갈 수 있도록 자원활동가 선생님의 도움으로 카페를 개설했다. 자신들만의 공간이어서 그랬을까? 서슴없이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글로써 드러내고, 드러난 상처들을 어루만지듯 격려와 관심의 댓글이 넘쳐났다. 이 공간은 서울역사 바닥이 아니고 고시방도 쪽방도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동료애가 넘쳐나는 가족 같은 ‘집’이었다.

 

나는 매일 올라오는 카페의 글들을 읽으며 이들의 트라우마를 함께 앓는다는 마음으로 댓글을 달았다. 이별과 아픔을 노래한 글, 하루하루의 일상을 덤덤하게 묘사한 글,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 관한 글,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상들, 서로 힘내자는 격려 글들. 컴퓨터 네모난 화면에 올라오는 이들의 글들을 읽으며 나는 문득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떠올랐다.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싹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내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의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가만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두 눈이 한쪽으로 쏠린 듯 여윈 얼굴들, 붙어버린 듯 바닥이 되어버린 삶, 좌우를 흔들며 파랑 같은 삶의 파고를 헤치며 살아온 물 속 세월들, 수족관 같은 시설이나 쪽방에서 죽음의 안쪽을 사는 것 같은 삶의 바깥쪽. 이 바닥 같은 가재미 삶에 나도 바싹 엎드려 눈을 맞추려는 자세가 내가 성프란시스 인문학 대학에서 처음 노숙인들과 만날 때 내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더 몸을 낮춰 내 눈을 맞춘 쪽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노숙인 선생님들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배고픔과 궁벽을 '의사(擬似) 트라우마' 삼아 시인이 되는 꿈을 꾸어왔다. 그러나 나이 50이 다 되도록 버리지 못한 소시민 근성으로 내 정신적 외상은 결국 진짜 상처가 되지 못했다. 맨살에 붕대만 감은 격으로 '야성(野性)'이 없는 내 시쓰기는 애초부터 진주가 될 수 없었다. 여린 조개의 맨살 속으로 파도에 쓸려 들어온 까끌까끌한 모래와 사금파리같이 날카로운 조개껍질에 배인 상처를 타액으로 싸매고 싸매 영롱한 상처의 꽃으로 여문 진주는 저들 가슴 속에 있었다. '진짜 트라우마'를 글의 밑천으로 글의 샘물로 깨닫기 시작한 이들의 시 속에 있었다.

 

 

저승사자가 사는 법

 

1-분당에있는 KT본사 안내로봇 음성녹음(Time\2만)

2-미대사관 비자신청 대신줄서기(Night\10만)

3-부천프린스 관광호텔 빠찡꼬 가짜손님(Time\8천)

4-강원렌드 카지노 대신예약 해주기(\15만..이백번안쪽 순번)

5-대치동 행복교회 신자머리수 채우기(\3만...일요일만)

6-부천시상동 참야콘갈비집 시식손님(\1만5천...갈비실컷먹고)

7-네비게이션 행사 야메고객(\4만)

8-노량진 공인중개사 학원 가짜수강생(3만5천)

9-월드라이센스 피라미드회사 가짜사업자(\3만)

10-코스닥 상장기업 ?소프트 주주대행(\7만)

11-화양동 국시원(의사면허 시험주관)환자대행(\6만...연기력 필요하고 삼일교육)

12-고대구로병원 피부임상 실험(\7만..신체부위별 뽄뜨는것)

13-수원여대 치의대 스케일링 환자대행(\1만5천...도랑치고 가재잡고)

14-서울대병원 비뇨기과 임상실험(\?????)

15-인천공항 외국항공사 전용탑승동 가상여객실험(\Night\3만...해외여행 경험자)

16-일산킨텍스 자격증 소양교육 대리참석(\5만)

17-부평역 동방부페 예식장 하객대리참석(\3만..,부페 배터지게 먹고)

18-강남성모병원 영안실 상주대행(\18만...All night)

19-한강예술 엑스트라 (A-\4만2천 N-\7만...바람의 나라. 대왕세종 등등..)

 

이외에도 많지만 저는 이것을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시간 날 때마다 고정적인 일자리를 꾸준히 노크하고 있으며 몸은 아파도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면서 힘차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화이팅!!!

 

저승사자라는 아이디를 쓰고 있는 노숙인 선생님이 어느 날 카페에 올린 글로, 2007년 9월 이후로 그가 일한 아르바이트를 목록처럼 열거해 놓은 글이다. 글을 읽어 가는 내내 나는 무거운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시인 흉내 내려고 썼던 가난과 궁벽이라는 내 의사(擬似) 트라우마의 가면이 낱낱이 찢겨 벗겨지는 것만 같았다. 거짓 삶을 살아온 것 같고, 거짓 시를 써 온 것만 같았다. 이 야생의 삶의 내력 앞에서, 나의 삶은 더욱 물기 없이 말라비틀어지고 한없이 바닥으로 주저앉고 있었다. 어떻게 댓글을 달아야할지 망연자실 컴퓨터 앞에 북어처럼 가재미처럼 앉아있는 내게, 저승사자는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게 부르짖"으며 마른 내 몸 위를 "가만히 적셔"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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