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경 장(성프란시스대학 글쓰기 교수, 문학평론가)
2009년 12월 겨울 초입이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를 칠판 위에 썼다. 짧게 시를 감상하고는 선생님들에게 각자 연탄에 얽힌 추억담을 풀어놓으라 했다. 반 이상이 60년대와 50년대 생인 인문학 선생님들은 저마다 따뜻했던 연탄추억담 하나씩을 풀어놓았다. “방금 풀어 논 연탄추억담을 시로 써보세요. 시작~~.”
눈사람
문 재 식
연탄재 굴려 눈사람 하나 만든다.
싸리 빗자루에서 눈 하나 코 하나 미소 하나 가져왔다.
손마디마다 하얀 눈가루 선명한데
뒤돌아본 내 발자국은 눈사람이 가져가버렸다.
이 시를 다시 떠올린 건 2011년 1월 말일 경 서울로 올라오는 차 속에서였다. 서울역에 모여 남해 바닷가로 6기 졸업여행을 출발하려는데 학무국장이 교수들만을 따로 불러 나직한 목소리로 비보를 전했다. “문재식 선생님이 오늘 새벽 지병인 암으로 돌아가셨답니다.” 즐거운 기분을 찾아나서는 여행길이라 6기 선생님들에게는 나중에 알리기로 하고 출발했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 날 주일 아침 숙소 앞 바닷가, 함께 간 박성광 신부님 인도로 간단한 추도미사를 드렸다. 나는 추모곡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부르기 전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올라오는 차 속에서 후회가 밀려왔다. ‘노래 대신 문 선생님의 <눈사람>을 낭송했어야했는데...’
문 선생님은 40대 초반으로 중키에 유난히 얼굴이 하얬다. 일 년 동안 자활로 인문학 주방일을 맡으셨는데 술 한 잔 입에 안 대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 년 동안 20여 명의 밥을 해댔다. 주방 일할 때나 야외 행사 도중에 자주 의자에 앉아 쉬곤 해서 한 번은 물었더니 허리가 조금 불편하다고 했다. 선생님은 이혼해 엄마와 함께 사는 중학생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심한 사고로 몇 달째 병원에 누워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자활로 번 돈을 모두 아들 병원비로 대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5기 졸업문집에 실린 문 선생님의 시 <눈사람>을 펼쳤다. 몸이 좀 불편한 건 알았지만 입학하기 전부터 척추암을 앓고 계셨다는 사실은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됐다. 선생님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눈사람>이 당신의 유고시가 될 거란 걸 알고 썼던 걸까. 성장해 20대 중반이 됐을 선생님의 아들이 아빠 시를 읽는다면 어떻게 읽을까. ‘( )’ 눈덩이를 뭉쳐 이렇게 읽지 않을까.
눈사람 (가족)
문 재 식
연탄재 굴려 (아들)눈사람 만든다
싸리 빗자루에서 (엄마)눈 하나 (아들)코 하나 (아빠)미소 하나 가져왔다
손마디마다 하얀 눈가루(가족) 선명한데
뒤돌아본 (아빠)발자국은 (아들)눈사람이 가져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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