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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발간

노숙인의 학습권을 생각한다 <거리의 인문학> 서평 (강대중)

by vie 202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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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인문학>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지음 - 강대중

「거리의 인문학」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지음, 삼인 출판   노숙인의 학습권을 생각한다 강대중/ 서울대 교육학과 부교수 “모든 국민은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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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의 학습권을 생각한다

강대중/ 서울대 교육학과 부교수

“모든 국민은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기본법 제3조)


한국 교육의 기본적 사항을 규정한 교육기본법 제3조의 제목은 학습권이다. 법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평생에 걸쳐 학습할 권리와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교육기본법에 학습권 조항이 도입되는 데는 198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차 유네스코 세계성인교육회의에서 채택된 학습권 선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학습권은 읽고 쓸 수 있는 권리이며, 문제를 제기하고 분석할 수 있는 권리이며,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권리이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역사를 쓸 수 있는 권리이며, 교육 재화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이며, 개인 그리고 집단에 의하여 배울 수 있는 기술을 계발할 수 있는 권리이다. (임해규, 2011, 《교육에서 학습으로》 57쪽에서 재인용)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인간의 생애 전반에서 지속된다. 그런데 입시와 학벌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높은 한국 사회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흔히 학력을 수여하는 제도권의 학교에서 전담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학습권을 학교 교육과 직접 관련된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국한된 권리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유네스코의 학습권 선언에 따르면 학습권을 향유하지 않고는 누구든 인간답게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학습권은 보편적 인권을 가능하게 하는 권리이며, 교육기본법이 규정한 대로 모든 국민이 평생에 걸쳐 누려야하는 권리이다.

1997년 말, 소위 IMF 경제 위기 당시 노숙인들이 서울역 대합실과 광장, 지하도를 점유했다. 그것은 경제 위기의 사회적 충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고 노숙인은 사회안전망 구축의 최우선 대상이 되었다. 2011년 여름 서울역 대합실로부터 노숙인들을 강제 퇴거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당시 언론들은 이른바 ‘풍선효과’를 언급하며 그 실효성을 의심했다. 노숙인은 공적 공간을 무단 점유하는 잠재적 범죄자로 그려졌다. 두 사건 사이의 10여년 동안 한국 사회는 IMF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노숙인은 해결 곤란한 무엇이 되어버렸다. 이 노숙인도 유네스코가 선언한, 한국의 교육기본법이 천명하고 있는 학습권을 향유할 세계 시민의 일원이자 한국의 국민일까? 2005년 9월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과정을 시작한 성프란시스대학의 초대 학장 임영인 신부는 이 책 《거리의 인문학》에서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나는 노숙인의 삶이 결코 나쁜 삶이거나 열등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노숙인이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추구하려고 할 때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노숙 문제는 노숙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 국가의 책임에 대한 문제이다.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헌법의 정신이라면 노숙인도 당연히 이것이 보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70-71쪽)


노숙 문제를 노숙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 국가의 책임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은 만큼 노숙인을 학습권을 향유할 시민으로 생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노숙인의 삶의 조건은 학습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노숙인은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이다. 대다수 노숙인들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학교를 다녔다고 해도 빈곤했던 부모의 무관심이나 교사와의 갈등 때문에 학교에서 의미 있는 학습 경험을 갖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정적인 학교 교육 경험 때문에 무엇이든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거리의 인문학>은 학습권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노숙인들과 더불어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웠던 성프란시스대학의 지난 7년 간 경험을 담고 있다. 책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과 일자리보다 그들을 자존감 있는 존재로 세우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얼 쇼리스와 임영인 신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난한 이들과 어떻게 만나왔는지를 담담하게 회고하며, 가난에 궁극적으로 맞서는 것은 우리 자신과 이웃의 삶과 역사를 성찰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얼 쇼리스는 외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칩니다. 인문학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험’한 사람들로 변화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갖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56쪽)


서울역 부근의 작은 강의실에서 글쓰기, 문학, 한국사, 예술사, 철학을 매개로 노숙인들의 도반이 되었던 다섯 분(박경장, 안성찬, 박한용, 김동훈, 박남희)은 서울 시내의 유명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님들이다. 이들은 평균 학력이 중학교 졸업 수준이라는 노숙인 학습자들에게 그동안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성찰한다. 그 성찰의 중심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학 수준의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의 개념 전복이 자리 잡고 있다. 가령, 철학을 가르쳤던 박남희 교수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부닥치는 많은 일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묻고 답하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노숙이라는 삶의 극한에 처해있다면 철학이 더 필요하다. 레비나스와 소크라테스를 읽고 토론하는 것은 노숙인 학습자들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한 매우 절실한 작업이다. 고흐, 뭉크, 뒤러 등 서양 미술사의 굵직한 작가들의 작품을 자신의 삶과 연관시켜 읽어낸 예술사 강의, 역사적 선택의 기로에 섰던 인물들의 삶을 돌아보며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 앞에서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하는 삶을 살아야하는가를 고민했던 한국사 강의, 루쉰, 소포클래스, 괴테, 니체, 플라톤의 작품을 읽었던 문학 강의,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삶과 생각을 겉으로 끄집어내기를 시도한 글쓰기 강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성프란시스대학이 그리 만만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 yes24


책에는 성프란시스대학의 주인공인 노숙인 학습자들의 수필과 시가 여러 편 실려있다. 2기 학습자였던 이홍렬 선생님(이 대학에서 노숙인 학습자의 공식 호칭은 선생님이다)은 ‘작심 30년!’이란 제목의 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성격이 야무지지 못하고 의지가 나약해서 무슨 일이든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어도 오래가지를 못한다. 흐지부지 유야무야 끝나는 것이 다반사여서 결심이 3일은 커녕 3시간도 못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아예 작심삼일을 실천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살아왔기에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채 항상 낙오되고 도태된 시간을 보내 왔다. 이러한 삶에서 다잡아 준 것이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이다. 그것은 내게 사랑이고, 은혜고, 전율이며 환희고, 축복의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내게도 작심삼일이 아닌 작심 30년을 지켜야 할 일이 생겼다. 졸업과 동시에 마음 속으로 굳게 약속한 그 일을 나는 지금까지 변화 없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공부다!” (338쪽)


책에는 성프란시스코대학의 또 다른 참여자였던 사회복지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의 경험담도 담겨 있다. 학습자들을 인문학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시도했던 몇몇 사업에 얽힌 일화와 강의 모니터링이 스파이 활동으로 오해받었던 사건 은 모든 형태의 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교육적으로 관계 맺기를 성찰할 수 있는 반면교사가 되기에 충분하다. 노숙인을 늘 거리에서 만나온 다시서기센터 이선근 활동가는 “‘관계의 빈곤’과 ‘교육의 빈곤’은 가난한 사람이 ‘가난함’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같은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다”(315쪽)고 말한다. 1년 동안 진행되는 인문학 과정은 노숙인들에게 두 가지 빈곤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왔다. 노숙인 학습자들이 인문학 과정을 통해 동료 학습자, 활동가, 교수, 자원봉사자들과 더불어 경험했던 관계 맺기는 한국의 노숙인 세계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동력이 되고 있다. 인문학 과정의 노숙인 선생님들은 풍물패, 축구팀, 빅이슈 잡지 등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책 서두에 얼 쇼리스는 자신이 처음으로 운영했던 클레멘트 코스를 수료한 열일곱명의 빈곤층 학습자들 중 열네명이 뉴욕의 바드대학으로부터 최고 6학점의 학점을 취득했다고 전하고 있다. 클레멘트 코스에서 학습한 결과만으로 정규 대학의 학점을 인정받은 것이다. 교육 문제가 빌 게이츠 같은 인재를 키워내는 문제, 입시와 학벌 문제, 혹은 사교육비 문제로 주로 다뤄지는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일을 꿈꾸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고졸 직장인이 직장 안팎에서 수백 시간의 교육과 몇 년간 현장 경험을 통해 특정 업무를 숙달한 뒤 정규 4년제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 특정 업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동일하게 다루는 과목의 학점을 직장에서의 학습 결과만으로 취득하는 것도 아직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책이 보고하고 있는 성프란시스대학에서 노숙인 선생님들이 학습한 결과들은 과목은 좀 달라도 서울대의 내 강의실에 앉아있던 웬만한 학생들의 학습 결과에 견주어 전혀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거리의 인문학》은 인권, 특히 학습권을 중심에 두고 노숙인 문제를 바라봐야한다고 웅변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는 명시적으로 학습권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책은 한국 사회의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료적, 경제적 접근과 더불어 교육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교육적 접근은 학습권에 대한 실천적 성찰을 요청한다. 노숙인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도록,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시민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교육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노숙인을 위한 교육적 지원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행복한 인문학》(이매진), 《한국의 노숙인》(서울대출판문화원)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회자되는가 싶더니 인문학 열풍 현상과 함께 대학의 정규 강의와는 관계없는 각종 인문학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현상을 이끈 한 주체가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문학 보다 더 적절하고 정확한 표현은 인문교양교육이라고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책 60쪽에서 임영인 신부는 “노숙인에게 ‘학(學)’이라고 표현할 만큼 거창한 것을 가르치지는 않기 때문”에, 또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을 하면서 ‘인문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어서 인문학이라는 말이 거북했으며, 오히려 인문교양교육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적고 있다. 제도적인 학교 외부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교육을 관장하는 한국의 평생교육법은 인문교양교육을 평생교육의 한 영역으로 적시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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