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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정 발자취/2018년 14기

14기 자원활동가 강민수 선생님 글 (다시서기 소식지)

by vie 2020. 11. 11.

죽음, 그리고 당신과 나의 인문학

그날도 겨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차갑게 굳어진 몸을 펼 수가 없었던 걸까?

나는 2014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서울역 희망지원센터에서 야간 아웃리치 상담원으로 일했다. 여느 때와 같이 서울역 지하도를 돌고 있었는데, 1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옆 지하 편의점 앞에는 한 무리가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한 분이 이미 취했는지 꾸부정하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밖은 추웠지만 지하였기에 위험할 건 없었다. 그때 그분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지나쳤던 것 같기도 하다. 한 바퀴 돌고 나서도 그분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있었다. “선생님하고 말을 걸었을 때, 몸은 이미 굳기 시작해 똑바로 펼 수조차 없었다. 무심했던 걸까.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하지 못한 나도,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그이들도. 다행히, 그는 내가 평소에 잘 알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 이후로도 서울역에서 자주 보던 OO님이 죽었다더라 하는 소식들을 듣게 됐지만,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는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행운에는 언제나 유효기간이 있는 법이다. 당시 서울역에는 휠체어를 타고 항상 보이는 분들이 세, 네 분 정도 있었는데, 그 중에 세 분은 나와 제법 가까웠다. 건장한 체구의 김OO님은 예전에 서울역에서 한 가닥 했다고 하는데, 공사판에서 발을 다친 후로 한쪽 발이 썩어 들어갔다. 처음 만난 날, 퉁퉁 부은 발에서 양말을 벗겼는데, 사람 발에서 구더기를 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곧바로 119를 불렀지만, OO님은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두려움에 병원으로 가지 않았다. 그 이후 희망지원센터 직원 분들의 설득으로 김OO님은 병원에 입원했고, 얼마 후 면회를 갔을 땐 다리를 자르지 않고도 치료를 할 수 있어 기뻐하셨던 기억이 난다. 몸 상태가 좋아져 퇴원했을 땐 얼마간 두 다리로 걷기도 하고, 거리 노숙을 멈추고 교회에서 지내시기도 했는데...

뭐가 잘못됐던 걸까. 이혼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이 사는 집이 본인 이름으로 되어 있어 수급이 안 되었던 것? 영구적인 장애가 아니라서 휠체어를 타지만 장애등급조차 없었던 것? 아니면 역시 통증을 잊는다는 이유로 마신 술이 문제였던 걸까. 다리가 아프고, 휠체어를 타야 하는데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쪽방이나, 계단을 올라가는 고시원밖에 구할 수 없는 임시주거비 25만 원이 문제였을까? 그도 아니면, ‘여기 말고 센터 안에서 주무시라고 그런 말밖에 하지 못한 내가 문제였을까. 그가 만나서 도움을 받겠다던 누님을 결국 만나지 못한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혹은 만났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걸까?

뭐가 문제였든, OO님은 2년 전 여름에 우체국 앞 지하도 계단에서 떨어져 생을 마감했다. 누구는 사고라고 하고, 누구는 평소에 가지 않던 거기에(OO님은 계단을 내려갈 수 없으니 아래에 있는 응급대피소에 갈 일이 없었다) 왜 갔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누구는 누가 죽었다더라 소문만 무성한 서울역이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나도 믿기지 않아, 병원 영안실에 누워 있는 김OO님을 보러갔다. 보고 나서, 내가 직접 봤는데 맞더라라고 말해주었다. 가족을 찾고 무연고 사망이 결정되는 얼마간, 시신은 병원에 안치된다. 그러다 가족이 나타나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르려면 그동안의 안치 비용도 모두 부담해야 한다. 안치 비용에 장례 비용까지 적지 않은 부담이다. OO님도 결국 무연고 사망으로 처리되어 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었다. 무연고사망 장례를 치러주는 나눔과나눔이라는 단체에서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간단한 장례식을 치렀다. 살아생전 김OO님과 가까웠던 지인 몇 분이 함께였다.

OO님과 서울역에서 가장 가까웠던 단짝 황OO님은 정작 장례식에 오지 못했다. OO님도 휠체어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OO님께 김OO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니, 황망한 얼굴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서울역 광장에 혼자 남은 황OO님은 유독 외로워보였다. 나도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OO님이 돌아가시고 2주가 지난 그날도 그랬다. OO님은 평소처럼 낮부터 광장에 누워 잠들어 있었고, 나는 직장 업무 때문에 바쁘게 광장을 지나며 그런 황OO님 옆을 무심히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다. OO병원인데, OO님 핸드폰에 연락처가 있어 전화했다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는데 상태가 안 좋다고. 바로 병원에 갔지만 의식이 없는 황OO님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편안히 잠이 든 것 같아 위독하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얼마 후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의식이 돌아와 있었지만 호흡기를 껴서 제대로 말은 할 수 없었다. 잠결에라도 의료장치를 뗄까봐 묶어둔 팔을 풀어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고 외면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의식이 돌아와 안심했는데.. OO님은 김OO님이 돌아가신지 꼭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옆을 지키지 못한 외로운 죽음이었다.

그로부터 1년 반쯤 더 아웃리치 상담을 한 후에야 활동을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마음엔 어느 정도의 채무의식과 무력감이 남아 있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과 3년 동안 계속해서 거리에서 만나는 분들에 대한.. 그러면서 동시에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자원활동가를 해야겠다는 결정을 했다. 휴식이 필요했고, ‘노숙인과 상담원이 아닌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위로받고 위로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싶었다. 한 학기가 지나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 있는 시간들이 편안해질 즈음.. OO 부회장님이 고시원에서 간밤에 혼자 자다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1학기 마지막 수업에서 인문학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관점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던 부회장님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정말 믿기지 않았지만,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인문학 교실에서 3일장을 지내며, 상주 역할을 하던 선생님들, 나보다도 더 슬퍼하는 것이 분명한 선생님들을 보며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적어도 외롭지 않은 죽음이라는 것. 혼자 돌아가셨지만, 함께 기억하고 슬퍼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인문학을 통해 배우는 인간의 존엄성이 아닐까. 그렇게 당신과 내가 만나는, 인문학을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 이 시간들이 하나하나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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