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제27호

[길벗 광장] 예술사 이야기 -토론 수업2

성프란시스 2025. 3. 20. 09:06

 

예술사 이야기 - 토론 수업 2

                                                                                                                           김동훈 / 성프란시스대학 예술사 교수

 

 

20년 전 성프란시스대학이 문을 열게 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는 번역, 출간되어 우리나라에 소개된 얼 쇼리스 박사의 희망의 인문학이다. 이 책에는 그가 어떻게 도시 빈민들을 위한 인문학 과정인 클레멘티 코스{메이저 리그의 전설적 야구선수이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앞장섰던 로베르토 클레멘티(Roberto Clemente)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첫 수업이 개설된 것도 뉴욕에 있는 로베르토 클레멘티 센터였다.}를 열게 되었는지, 그 교육원칙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영어 원저 제목은 Riches for the poor : the Clemente Course in the Humanities(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풍요로움: 클레멘티 인문학 교육 과정)이다. 이 저서 제목에서 이러한 교육 과정이 탄생할 수 있게 한 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풍요로움이 인문학 안에 있다는 믿음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듯 얼 쇼리스가 이런 확신을 갖게 된 것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비니스 워커라는 한 여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그녀는 교도소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철학을 전공하면서 대학 과정을 밟았다. 교도소에서 그녀는 가정 폭력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다른 여성 재소자들에게는 상담자의 역할을, 그리고 에이즈 때문에 신경쇠약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 재소자들에게는 위안자의 역할을 했다.”(얼 쇼리스 지음, 고병헌이병곤임정아 옮김, 희망의 인문학, 이매진, 2007, 166) 그 자신도 에이즈 병세가 심해지는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그녀에게 얼 쇼리스가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 같냐고 묻자 한참 뜸을 들인 다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같은 책, 168)

과연 인문학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많은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적어도 이 책의 영어 원서 제목에 나오는 풍요로움이 물질적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난도 물질적 가난으로만 생각해서는 수많은 반박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이전 글들에서 가난과 행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기에 여기서는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가난을 극복하는 방법은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풍요를 이루는 데 있다. 정신적 풍요가 물질적 풍요로 이어지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재정적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으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다시 처음 시작점으로 되돌아가 버릴 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숙 경험이 오래될수록 신체적 건강을 많이 해쳐서 이른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그러니까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기가 어려운 분들이 꽤 많기에 이들에게 다시 사회에서 이른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라고 떠미는 것이 그분들에게는 오히려 폭력일 수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비니스 워커가 말한 것처럼 정신적 삶을 가르쳐 주며 도덕적 대안’(moral alternative)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의 삶이 풍요로워질 거라는 게 그녀 말의 의미였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클레멘티 코스를 시작하면서 그가 수업의 기본 원칙으로 삼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첫 수업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철학 수업에서 강의를 하지 않고 대신 산파술이라고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파술은 조산술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온 것으로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대화할 때 산파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 그럼. 대체 제가 뭘 한다는 말일까요? 산파는 어떤 일일까요?”(같은 책, 236) 그는 바로 그 순간 자기 학생들이 소크라테스와의 사랑에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18년여의 경험으로 나도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예술사 수업에 참여했던 많은 선생님이 소크라테스는 아니지만 토론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도 얼 쇼리스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 학생들에게 진리나 해답은 이미 그들 안에 있으며, 다만 대화를 통해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으며, 우리 학생들도 그 후부터는 자기 자신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인문학은 우리 학생들이 자기 안에 내재된 인간의 존엄성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고,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그들 또한 사랑을 통해서 변화되어 갔다.”(같은 곳)

그렇다면 도대체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란 무엇인가? 정말로 대화를 통해서 자신 안의 진리는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까? 덕성여자대학교 철학과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등에서 나는 대학생들과도 토론식 수업을 진행해 왔다. 학생들은 대부분 매우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했으며 그들이 토론을 통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선생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고, 한 주의 수업이 끝날 때나 한 학기 수업이 끝날 때 학생들에게 나도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해준 적이 많았다. 물론 가장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곳은 성프란시스대학 예술사 수업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학교에서 만난 강사 선생님들은 토론식 수업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드물었다. 심지어 토론식 수업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개설된 교양과정인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강사 선생님들조차도 내게 도대체 어떻게 토론 수업이 가능할 수 있느냐며 질문을 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대부분 토론식 수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언제든 말할 기회만 있으면 마음을 활짝 열고 토론에 참여하고 거기서 많은 것들을 얻어가는 데 반해 강사들은 말 그대로 강의를 편하게 생각하고 토론 수업을 힘들어한다는 것이 교양 수업을 맡았던 어떤 대학에서든 받은 인상이었다. 여기저기서 소크라테식 문답법과 산파술에 대해 말들은 하지만 정말로 그 방식을 신뢰하고 실천에 옮기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인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아마도 산파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오해 때문일 것이다. 내게 어떻게 토론 수업을 진행하냐며 자신은 포기했다던 어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강사분이 했던 생각도 이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산파술은 교육자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지만, 피교육자에게 미리 가르쳐주지 않고 대신 질문의 방법을 통하여 스스로 정답을 찾도록 돕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교육자가 미리 정답을 알고 있지 못하면 질문도 방향을 상실하게 되고 따라서 둘 다 오리무중으로 헤매게 될 거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방향을 상실한 배가 표류하는 것처럼 선생과 학생 모두 망망대해에서 어쩔 줄 모르고 표류하는 신세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 적어도 교육자에게는 -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많은 교육자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교육 지침을 접하게 된다. 이러저러한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가능하면 달성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결과까지도 미리 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몹시 불안해한다. 바로 이러한 산파술에 관한 생각이 많은 경우 소크라테스식의 교육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겉으로는 피교육자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모두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은 않았던 거다.

그렇다면 과연 소크라테스 자신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갈린다. 특히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소크라테스도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 계속 질문을 던지거나 일정한 방향에 따라 질문을 던지면서도 겉으로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에서 한 노예 소년에게 주어진 정사각형의 두 배의 면적을 갖는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방법을 질문과 대답의 형식만을 빌어서 깨닫게 해주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우선 질문을 통해서 깨닫게 해준 것은 두 배의 면적을 갖는 정사각형을 작도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각 변의 길이를 두 배로 늘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 소년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 단계를 거쳐서 두 배의 면적을 갖는 정사각형은 주어진 정사각형의 대각선을 한 변으로 갖는 정사각형을 작도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이런 경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교육자가 미리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고 피교육자가 스스로 그것을 발견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이렇듯 미리 정답을 알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만 문답식 토론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면 정답이 없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인문학에는 적절하지 않은 방법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런 경우만을 염두에 두고 토론식 대화를 이끌어갔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자신에 대한 신탁이라고 믿었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태양의 신이자 지혜의 신인 아폴론 신전의 입구에 새겨져 있었다. 거룩하고 영원한 신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되새기라는 말로 우선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서 지식의 확실성과 관련하여 사뭇 다른 결론을 제시한다.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나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말은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인간은 무지하다는 고백이 아닐까? 진정한 진리는 결국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그가 설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론을 연구하면서 사람들은 이 두 소크라테스 사이에서 헤매며 많은 갈등을 느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노력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둘 중의 하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다른 경우에는 둘 사이에 단계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무지의 발견과 고백이 먼저 수행되어야 할 단계라면 그다음에 산파술이 적용되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진리의 발견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진리는 진정 어디엔가 존재하면서 우리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고 우리의 임무는 발견 그 자체뿐일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 앞에 쌓인 수많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이렇게도 많은 견해의 차이와 반목, 대립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수많은 일상의 문제들뿐만 아니라 교육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정답을 소유하고 있을까? 정말 진리는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일까? 어떤 경우에는 그렇다. 앞서 제시한 상대적인 진리들의 경우에 말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내용으로서의 궁극적 진리는 우리에게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다. 수많은 철학자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에 관해 설명해 왔다. 한 예를 들어보자.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이 세상을 들여다보는 방식을 감각적 직관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직관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또는 육감에 의해서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 말의 뜻은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그대로 들여다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직관은 적어도 완벽한 형태로는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감각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인간의 감각은 유한하기에 절대적이고 무한하며 영원한 진리에는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의 직관은 오직 신에게만 가능하다. 감각적 직관을 지닌 인간은 결국 이러한 한계 때문에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가능한 것은 오직 그에 무한히 접근해 가는 과정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교육의 목표도 궁극적인 진리에의 도달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끊임없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교육의 내용은 바로 이러한 방법론을 가르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 근거하여 바로 그 방법론을 가르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아니, 가르쳐야 할 방법론과 가르치는 방법론의 일치가 가장 중요한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개별적인 교과과정의 내용을 전달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개별적인 교과과정의 내용이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라면, 그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고 새롭게 더욱 근원적인 진리로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육의 내용이자 과정이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이런 의미에서 이중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상대적인 진리, 즉 어떤 전제가 충족되거나 어떤 체계를 미리 받아들였을 때 언제나 성립되는 진리의 내용을 가르칠 때는 소크라테스가 노예 소년에게 행한 것과 같은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올바른 방법이다. 이때는 교육자가 미리 정답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상대적 진리가 피교육자에게 가르쳐야 할 궁극적인 내용은 아니다. 흔히 우리는 교육의 목표가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2+3이 왜 5가 되는가를 열심히 설명하거나 무조건 외우라고 강요하는 것은 최악의 방법일 것이다. 2+3=5를 가르쳐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러한 계산 방식을 사용하여야 하는가를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언젠가는 매우 어려운 수학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계산 방식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가르치는 것보다 어떤 문제가 닥치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는 내용 면에서 궁극적인 의미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산파술은 이런 경우 궁극적인 진리의 내용 자체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더욱 깊이 진리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진심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 순간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적이고 구체적인 진리에 대해서 우리는 언제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혹시 모르더라도 나중에 알게 될 가능성도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궁극적인 진리는 도달 불가능의 영역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에게 여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산파술 실천의 어려움에 대한 하소연은 산파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산파술의 진정한 전제는 궁극적인 진리는 아무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상대적 진리는 소유와 전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교육자가 피교육자에 앞서 이러한 상대적 진리를 알고 나서 산파술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전달하는 것도 매우 훌륭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산파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궁극적인 진리에의 도달이 아니라, 교육자든 피교육자든 열린 마음으로 자신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살피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함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상대적 진리를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가는 따라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출발하든, 얼마나 많은 객관적인, 상대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든 상관없이 피교육자와 교육자가 함께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나는 그런 경험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거기서 얻는 행복을 너무도 많이 누렸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예술사 수업을 시작할 때 내가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에 차서 우리 선생님들을 만나러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 구체적인 실례들을 제시해 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