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인터뷰] 어둡고 힘든 과정을 이겨 낼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정동주 선생님
글: 김혜진
인터뷰어: 김혜진
인터뷰이: 정동주/ 성프란시스대학 20기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이 수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한지 올해로 20년이 되었습니다. 인문학과정을 통해 많은 분들이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많은 변화를 만들어 가기도 했습니다. 20년의 성프란시스 대학 역사를 뒤돌아 보는 한 과정에서 감사함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는 성프란시스대학 20기 회장 정동주 선생님을 모시고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20기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정동주라고 합니다.
Q: 선생님께서 1학기 글쓰기 수업 때 ‘나는 얼음이다. 지금은 차갑지만 녹으면 사람들에게 시원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본인을 표현해 주셨는데요. 정동주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지, 가슴 속에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계신지 궁금해요. 우선 성프란시스대학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A: 성프란시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재학생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특수성을 가지고 있죠. 사회에서는 노숙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패배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취약계층 소수자들이죠. 외면 받고 소외된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사회에서 소외되었고 노숙을 하게 됐었죠.
그 때가 10월 말이었는데 새벽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면서 거리에서 잠을 자는 것이 힘들게 되었어요. 그러다 부끄러운 일인데 도둑질을 했어요. 빨래방에 가서 이불을 훔쳤어요. 지하철에서 자는 것이 너무 추워서 덮고 자려고요. 그 일로 경찰서에 잡혀 갔는데 형사분이 상황을 듣고 제 얘기를 진실로 받아들여 주셔서 전과 기록에 남지 않게 벌금으로 처리해 주셨어요. 이전에는 남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극심한 쪽으로 내몰리다 보니 본능적으로 그런 일을 했던 것 같아요.
Q: 아.. 정말 힘든 시간이였겠네요.
A: 그 당시에는 부정적인 생각만 들다 보니 삶의 애착도 없어져서 제가 이런 처지가 되도록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을 죽이고 죽을지 아니면 그냥 혼자 죽을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고심 끝에 사회적 파장도 우려되고 주변 지인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혼자 목숨을 끊으려고 잠실대교 위와 어릴 때 살았던 아파트 15층 옥상 위에서 투신 기도를 하기도 했었죠.
Q: 그런 가슴 아픈 일이 있었군요.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A: 그렇게 왕십리 공원과 왕십리 역사 내려가는 계단에서 노숙을 하며 지냈는데 주변머리가 없어서 몇 날 몇 일을 굶다 보니 추위와 배고픔에 지치고 몸이 많이 나빠져서 노숙인 임시보호 시설을 알아보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서울역은 정말 가기 싫었어요. 왜냐하면 예전에 서울역 희망지원 센터 앞에서 목사님들과 식사제공 봉사를 토요일마다 했거든요. 그래서 피한다고 찾아간 곳이 숙대 근처 센터였는데 결국 같은 다시서기 센터였습니다. (웃음) 입소해서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밥 주면 밥이나 먹고 잠 자라고 하면 잠이나 자는 제 모습이 내가 키우던 반려동물이나 화초와 다를 게 없지 않나 하는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좋게 보셨는지 일을 해볼 것을 계속 권하셨어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반일제를 하게 되었는데 제가 맡은 일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했어요. 이주쯤 지나니 전일제를 권하시더라고요. 센터에 입소한 기간도 짧고 먼저 신청한 분들도 많이 계셔서 순리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거절했는데 그 때 박은철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계속 일자리 권유를 하시면서 그 분의 살아온 이야기며 서울역 와서의 생활, 지금의 사회복지사로서 일하게 된 과정도 이야기해 주셨어요. 일을 하다 보면 긍정적인 마음도 생길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에 그 분의 진심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다시 한번 전일제 일을 해 볼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센터에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제 업무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여러가지 인정도 받게 되고 센터 관계자 분들과 신뢰도 생기면서 그동안 외면해 왔던 좋은 인간관계도 쌓을 수 있었어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을 수료하신 선배분들도 만나게 되었는데 성프란시스대학 인문과학과정에 참여해 볼 것을 권해 주셨어요. 인문학 수업을 통해 제가 잊고 있었던 마음을 회복할 수도 있고 정말 어려운 여건속에서 힘겹게 살아오신 분들도 만나면서 제가 경험해 본 좋은 인문학적 소양이나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 답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 주셔서 성프란시스대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Q: 이전에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와 복지관등에서 발달장애 아동들을 치료하는 행동치료사로 일했는데 행동치료와 가족심리상담일을 병행했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설계일을 했었고, 캐나다에서 비즈니스를 공부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나서 한국에 들어와 취업이나 여러 이유들로 행동치료와 상담학을 다시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고 상담사로 일하게 되었죠.
Q: 상담사로 일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나 일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A: 밀알 학교에서 중등부 교사를 할 때 중증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었어요. 어느 날 저녁에 제가 신천 거리에 서 있었는데 인기척도 없이 제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서는 제 손을 꼬옥 잡고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거에요.. 깜짝 놀라서 보니까 그 아이였어요. 중증 발달 장애가 있어서 저를 인지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선생님인 저를 알아보고 와서는 제 손을 잡은 거예요.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감동 때문에 눈물이 찔끔찔끔 나고는 합니다.
Q: 그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감동이었을까요. 치료와 상담일을 하셨는데 특별히 장애인 관련 분야 일을 하고 싶으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A: 제 이종사촌 누나의 큰 아들이 중증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가 돌봐주다 보니 전문적인 치료사가 되어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는 것도 생애 의미 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장애인을 위한 치료와 상담일에 애정이 많으셨다는 게 느껴집니다. 우리 사회가 노숙인이나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해서 앞으로도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어떤 부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A: 캐나다에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장애인들이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다니기도 하고 활동 보조인이나 치료 바우처 제도들이 있어서 일정 지원을 받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래긴 했어요. 옛날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죠. 그렇지만 아직도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는 인간을 상품화하고 우월주의. 능력주의에 많이 치우쳐 있어요. 교육이 바탕이 되어 의식의 개선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는 아직도 후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 장애인이에요. 사회 소수자들도 그 존재 자체로서 똑같이 인정받고 대우를 받아야죠.
Q: 능력주의나 우월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삶의 중요한 가치들은 어떤 것들인가요?
A: 대학교때는 불의한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고 정의로운 사회 구현과 민주화를 위한 데모도 많이 했죠. 개인의 커리어나 나만의 미래를 위해서만 살 것이 아니라 사회 여론을 이끌고 정의로운 사회, 민주화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Q: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정의로운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요?
A: 모두가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사회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Q: 맡은 일들과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대해 최선을 다해서 살아오셨네요. 일을 마친 후 여가 시간에는 무엇을 하세요?
A: 여러가지로 힘들어진 지금의 처지에서는 취미 생활은 사치라고 생각하고 바쁘게만 살았어요. 부정적인 생각들이 불쑥불쑥 엄습해 오기 때문에 일하고 난 이후의 나머지 시간에는 빨래나 청소 등 개인 정비를 하거나 규칙적으로 다른 일들로 메꾸려고 노력해요. 요즘은 가끔 컴퓨터로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지금은 마음 편히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성프란시스대학을 다니면서 그동안 외면하고 잊고 있었던 활동들을 하게 되었어요. 예습, 복습을 빌미로 책들도 읽게 되고 철학적인 문제도 심도 깊게 생각해 보기도 하고 시나 수필을 쓰는 문학적 활동에 몰두하기도 하고요. 하다 보니 재미도 있고 지금 처지의 괴로움도 잊게 되고, 그런 활동의 결과물이나 거기에 할애하고 있는 시간 자체가 긍정적이기도 하고요.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성프란시스대학의 수업 과목들이 촉매가 되었어요. 만약 성프란시스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면 그동안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계속 허무해하며 돈을 벌고 갚는 일에만 매진하든지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혀 무미건조하고 강퍅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 같아요.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스스로에게 여러 질문들을 하고 그 대답을 생각해보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들이 자존감 회복이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역할들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성프란시스대학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한 학기를 마친 소감을 듣고 싶어요.
A: 그저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인간의 정체성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특성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절대적인 정체성도 있고 사회 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정체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프란시스대학 안에서의 제 정체성도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무엇을 하든 스스로에게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번아웃 될 때까지 몰아 부쳤는데 요즘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듣고 평가도 받아들이면서 ‘좀 틀리면 어때’ 하는 생각속에 저를 쉬게도 합니다. 20기 까페에 올린 글들에 감동받았다는 댓글이나 뱍경장 교수님의 칭찬을 들으면 더 잘해야겠다는 도전도 되고요. 무언가를 더 잘해보고 싶다는 욕구 자체를 느끼는 것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Q: 한 학기를 지냈는데 20기 회장으로서의 어려움이나 고민이 있을까요?
A: 20기 선생님들의 살아온 삶이 다 다르고 그 삶의 여정에서의 고민과 힘듦이 다르기 때문에 한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함께 맞춰 나가는 것이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좌절감과 실망감도 많이 느꼈어요. 지금은 나만의 틀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반성과 노력도 많이 하고 선생님 한 분 한 분을 존중하고 그 분들 곁에서 그 분들의 삶을 보듬으며 함께 나가려고 힘쓰고 있어요. 그것이 성프란시스대학의 인문학과정이 다른 인문학 수업들과 차별화된 점인 것 같아요. 성프란시스 대학에서 배우고 추구하는 인문학은 학문적인 인문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녹여낸 인간학이라고 생각합니다.
Q: 정동주 선생님께 성프란시스대학이란?
A: 애증의 숙제죠 (웃음). 사랑하지만 버리고 싶기도 하고 그러나 떠날 수도 없는… 지금도 삶의 많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으니 성프란시스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저에게 남겨질 숙제인 것 같고요. 또 제가 성프란시스대학을 통해 고마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분들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그런 감사함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고요.
Q: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새로운 삶의 방향이나 목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A: 살면서 여러 문제들로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사고의 기능이나 대화 능력 같은 것들이 많이 떨어졌어요. 가끔씩 부정적인 생각이 들거나 우울, 공황 같은 것들도 여전히 올라와요. 백퍼센트 회복이 되지는 않았죠. 그것을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도 했었는데 혼자는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많이 회복되었어요. 잊고 있었던 철학적인 문제들이나 젊을 때 관심가졌던 활동들도 많이 하게 되었고요.
저는 ‘나는 실패한 인간이다, 실패한 인생이다’ 라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 제가 붙잡고 있는 생각은 ‘나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에요. 인생은 성공과 과정이 있을 뿐이지 실패는 없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저에게 상담을 해 온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너는 태어나서 서기까지 이천 번 이상 넘어지고 기는 과정을 통해 드디어 서고 걷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천 번 이상 넘어지는 실패를 이겨내고 결국 걸어 다니게 되지 않았는가. 어둡고 힘든 과정이 길어질 지 언정 그것을 이겨 낼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저는 그 생각을 붙잡고 살고 있습니다.
** 마음에 새겨 두고 싶은 말이네요. 그런 의지와 노력으로 하루 하루를 만들어간다면 언젠가는 각자가 원하는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동주 선생님의 삶을 함께 응원하겠습니다.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동주 선생님의 자작시 <북한산의 봄>을 올려드리며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북한산의 봄
정동주
미처 슬퍼할 사이도 없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하지만 내가 사는 변방엔 아직도 눈이 내렸다.
경계도 없이 내리는 눈
범람하는 바람 속으로
내 영혼의 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춘설(春雪)이 흩날리는 동안 마른 풀잎만 나풀거렸고
내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떠나간 여자처럼
먼 산으로 날아간 새는 더 이상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마른 기침을 쿨럭 거리며 객지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이 피고 진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마는
노새를 타고 저 아득한 시공을 건너오는 이의 목소리
봄은 춘몽(春夢)의 강을 건너
집시들이 현을 뜯는 언덕을 지나
한지에 스며드는 먹물 마냥 더디고 더딘 몸짓으로
산기슭을 타고 오르는데
보았는가. 그대 창가에 핀 목련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만나고 스러지는 시점에서
내 몸 안에서도
여린 이파리들이 별일 아닌 듯 사사로이 돋아나고
밤새 시리도록 별들이 뜨더니
각혈하듯 산벚꽃이 핀다.
신열이 도져 아픈 봄날
살아있는 것이 항시 죄스러워
숨죽여 기도를 한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리운 것들은 산에 있었다.
산에 있는 식물성들은 죄다 꿈을 꾼다.
그립기 때문에 꿈을 꾸는 거다.
21 야영장의 가스등 불빛 내가 두고 온 여자도 거기에 산다.
하여 미친 듯 꽃물 드는 봄이 오면
두둥실 꽃구름 타고 북한산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