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 8월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있었던 일] 식민지 역사 박물관
현장 학습: 식민지 역사 박물관 견학기
정동주 /인문학 20기
성프란시스대학 한국사 1학기 마지막 수업으로 용산구 청파동에 위치한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용산에는 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 유적과 박물관이 풍부하다. 왜 하필 용산일까? 이 지역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었고 일제강점기가 시작할 때부터 일본군 주둔지와 일본인 거주지역이 형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용산과 본래 용산은 또 다르다. 원래 용산은 마포와 인접한 곳으로 원효대교와 마포대교 사이 한강변을 가리켰다. 하지만 지금의 용산은 신용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삼각지 일대이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삼각지 근처에 영국군과 미군 포로수용소가 운영되기도 했다. 인근 효창공원은 본래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의 묘가 있던 효창원이었지만 일제가 이장하고 이곳에 골프장등을 건설하며 훼손했다.
해방 이후에서야 변화가 시작됐다. 효창원에는 민족지사들의 묘역을 조성한 효창공원과 축구경기장인 효창운동장이 생겼고 포로수용소 자리에는 학교가 들어섰다. 일본군이 주둔하던 기지에는 국방부와 미군기지가 생겼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친일반민족세력을 규정하고 이들에게 죄값을 묻기 위한 국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용산 숙대 앞에 자리하기도 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바로 이 자리에 세워진 역사적으로 의미가 남다른 박물관인 것이다.
이 곳에서 친일파들을 조사하고 처벌했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들과 손잡고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해산시켜 버린 아픈 역사적 사실이 있다.
축하받을 기념일도 아니고 달력에도 없는 날이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 날이 있다. 8월 15일 광복절 14일 후인 8월 29일은 어떤 날일까? 1910년 이 날은 우리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강제로 넘어간 날이다. 이 해가 경술년이고 나라가 치욕을 겪은 날이기 때문에 경술국치일이라고 부른다. 이날부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는 여러 박물관에서 전시한다. 그런데 이 시기를 식민지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 식민지 시기 일제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제격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2018년 8월 29일 개관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나라나 지자체에서 세운 박물관이 아니다.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제대로 봐야한다는 뜻에 공감한 시민들이 힘을 모아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기증해 만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박물관의 취지를 공감한 뜻있는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도 함께 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식민지 시기 역사를 전시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어서 시민들이 알아야 할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널리 알리기도 한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의 현장으로 나가 박물관의 목표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며 식민지 시기는 끝났다. 그런데 이 날이 되었다고 식민지 시기 동안 일어난 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된 건 아니다. 오히려 해결해야할 많은 과제가 우리 앞에 놓였다. 친일파 청산, ‘일본군위안부’ 문제,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강제 동원 피해자 문제가 대표적이다. 이 문제는 여러 사람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있다. 따라서 식민지의 역사는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끝나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전시했는지 눈여겨보고 왜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하는지 생각을 하며 전시를 본다면 좋을 듯 싶다.
유독 내 관심을 끌었던 전시물을 몇가지 소개해 본다.
1) 청일전쟁 당시 경복궁 침략을 그린 판화
일제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치밀하고 집요하게 계획을 실행했다. 이런 점에서 눈여겨봐야할 사건이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청나라와 싸우기 전 일본은 고종이 있던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그리고는 전쟁에서 일본을 도우라고 협박했다.
이 그림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장면을 그렸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고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입김은 더욱 거세졌다. 10년 후인 1904년 일본은 러시아와 싸웠다. 이번에도 일본은 일본이나 러시아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는 고종을 협박해 일본 편을 들도록 만들었다.
2) 조선신궁전경도
식민지 시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신에게 절을 해야 했다. 식민지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믿음을 강제 당했다. 일본의 신을 봉안한 곳을 신사라고 불렀고 가장 격이 높은 신사를 신궁이라고 불렀다.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은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매우 커서 서울 여러 곳에서 훤히 보였다. 식민지 끝 무렵에는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우리말도 사용할 수 없었다. 나라에 의해 강제로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상황이 식민지의 현실이었다. 남산에는 조선신궁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이 자리 일부에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들어섰다.
3) 친일인명카드
식민지 시기 적극적으로 일제 편에 서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괴롭히고 독립을 방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흔히 친일파라고 부른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의 죄를 밝히고 이에 벌을 줘야하는 일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났다. 이에 ‘임종국 선생’은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고 친일파의 행적을 찾고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그가 작성한 카드다. 박물관 1층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전시된 임종국 선생의 흉상과 저서가 눈에 띈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파 역사 연구의 선구자로 유명 문인들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친일문학론’은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잊고 넘어갈 때 애써 노력한 사람 덕분에 친일파 문제는 묻히지 않았다.
그 노력 끝에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와 사람들은 친일파가 어떤 일을 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통로를 중심으로 좌, 우에 친일의 삶을 살았던 놈들과 항일의 삶을 살았던 분들의 행적이 대조되어 전시되어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효창공원이 나온다. 효창공원에서는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다. 백범김구기념관에서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의 일대기가 전시되었다. 기념관 옆으로 김구 선생의 무덤이 있다. ‘삼의사 묘역’에는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의 무덤, 독립운동가 백정기 선생의 무덤이 자리 잡았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무덤도 있지만 시신을 찾지 못해 이 무덤은 비어있다. 한편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이 잠들어 계신다.
효창공원에서 가까운 곳에 이 동네에서 살았던 이봉창 의사를 기념하는 이봉창역사울림관이 있다.
박물관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햇볕도 들지 않는 지하에 걸려있는 허름한 현수막을 문득 보게 되었다. 그 현수막에 적혀있는 임종국 선생님께서 남기신 말씀이 관람 후 답답하고 무거웠던 내 마음에 비수같이 날아 들어왔다.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임종국
*광정(匡正):잘못된 것이나 부정(不正) 따위를 바로잡아 고침.